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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건축구조

정령치 홍 2013. 12. 25. 15:57

                                     한국건축구조

                                                                                               김 봉 건(문화재연구소장)

       

1. 목조건축의 흐름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목재를 중요한 구주부재로 사용하여 건축물울 건립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목조건축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이는 석조건축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석굴암 석굴과 같은 훌륭한 석조건축물울 건립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주류를 이루는 건물은 목재로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목재를 중요부재로 건물을 구성하는 방식은 우리 주변의 중국, 일본에서도 공통된 방식으로 소위 ‘동양계 목조건축’ 방식을 공유하였다. 목조건축 위주의 방식은 서양의 석재를 이용한 석조건축이 주류를 이루었던 건축문화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방식이었다.

우리 전통 목조건축의 기원에 관한 것은 현존하는 최고의 건축유산인 봉정사 극락전이 13세기 건물에 불과 하는 등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문헌자료, 고분벽화 등의 건축도, 건축문양 등에 나타난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건물지에 대한 발굴자료 등도 추정의 정확도를 높여 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유사한 건축방식을 공유한 주변 국가들의 목조건축 발달과정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은 단서를 제공해 준다.

 

1) 선사시대 건축

  한반도에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이 거주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선사시대의 주거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적어도 20-30만 년 전부터 이 땅에 인류가 기거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시대의 주거지는 동굴 등 자연을 이용한 형식으로 보이나 공주 석장리에서는 집터로 보이는 기둥구멍과 석렬, 문돌 등이 발견되어 천막집터 ?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원시집터는 대개 기원전 7,000년부터로 추정되는 신석기 시대 이후의 것으로 그 형태는 땅을 파고 민든 ‘수혈주거’라 부른다. 발굴조사의 결과는 문헌상의 기록과 일치한다. 즉 <후한서> 동이전 읍조루에는 --기후가 매우 추워서 항상 구덩이에 살고, 깊을수록 귀하고 큰집은 9단의 사다리로 오른다--고 표현되어 있다. 탄소년대 측정결과 기원전 4,000년 전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암사동 수혈주거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깊이 30cm 정도로 땅을 판 뒤 장방형 평면의 중앙에 불울 사용한 로(爐)를 배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쪽으로 출입구 흔적도 발견되었다.

청동기 및 초기철기시대에는 수혈주거의 규모가 신석기시대보다 커지는 경향이 있으며 청암리유적에서는 칸막이벽의 흔적이 발견되어 가족 구성원의 증가에 따른 ‘공간의 분화’ 경향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서까래가 지면에서 위로 올라가 있을 가능성을 보여 수혈주거의 ‘지상건축화’가 진행되는 변화를 읽어 볼 수 있다. 대체로 이 시대의 수혈주거는 신석기시대의 주거에 비하면 평면규모가 증대하면서 기둥렬이 평면 중간과 변두리에 나타나 있어 암사동 수혈주거와 같이 단순한 원시적 가구구성이 아닌 좀더 발달한 형태의 건축가구를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의 중도집터에서는 로와 함께 연결된 부뚜막 유구가 발견되어 오늘날 한반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온돌의 발달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 까지의 수혈

 

주거는 오늘날 우리가 목조건축이라 보기는 어려운 천막과 유사한 매우 원시적인 형태의 건축형태이나 다만 기둥이나 서까래 등의 주요 건축부재는 목재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삼국시대 건축

이후 삼국시대에 들어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정치적 권력을 지닌 강력한 국가가 성립되면서 목조건축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건축은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한 기술력과 경제력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목조건축이 발달하게 됨은 필연적이자.

고구려의 목조건축과 관련하여 우선 성곽의 구조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는 최초로 도읍한 국내성을 비롯하여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평양성과 장안성 등을 축조하였다. 이들의 구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각종 분묘에 그려진 건축도를 통하여 그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요동성총에는 성곽도가 그려져 있는데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모서리와 성곽의 중앙에는 단층 혹은 중층의 문루가 묘사되어 있다. 한편 내성에는 3층으로 보이는 건물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당시 이미 중층건물이 일반화 될 정도로 목조건축구조가 발달하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궁궐로는 안학궁지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52개소의 건물터가 발굴되엇다. 남궁의 중심건물인 정전은 정면 11칸 측면 4칸(49m X 16.3m) 규모로 웅장하고 화려했던 건물규모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정전 평면 중간에는 기둥렬이 생략되어 소위 감주수법을 채용하고 있는 등 당시 목조건축기술 수준이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찰건물의 유지로는 금강사지와 정릉사지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8각형 평면의 탑지가 발굴되었다. 팔각형과 같은 다각형평면을 목구조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면평면에 비하여 좀더 숙련된 기술을 필료로 하는데 이는 다각형에 따르는 목구조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목구조 기술이 발전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고구려 건축기술의 발달 정도는 앞에서 설명한 사례 외에도 고분벽화에 그려진 두공도를 통하여 건축세부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공포에는 첨차를 2개 또는 3개를 사용하였으며 첨차에는 소로를 2-3개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인자대공 혹은 동자주를 사용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 다포계의 발전과정에서 아직은 기둥 사이를 주간포와 같은 공포를 설치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하여 볼 사항은 석실의 축조구법이다. 석실은 천장부분에서 석재를 내밀어 쌓으면서 중앙부분은 방형 평면의 마름모꼴로 돌려 쌓아 마치 아치형과 유사한 천장을 형성하는 수법인 말각천장을 만들고 잇다.

주거건축과 관련하여 집안 대동자 유적에서는 고래와 같은 유구가 발견되어 온돌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민주거로는 누목식 고상식 건축이 사용되었음을 각종 문헌기록과 마선구1호분에 그려진 건축도를 통하여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제건축의 직접적인 유구는 현존하지 않으나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청동제 소탑편을 통하여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하다. 여기에는 하앙을 사용한 구조형식을 찾아 볼 수 있어 완주 화암사의 하앙과 함께 거의 사라진 목구조 구법이 당시 백제에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발견된 가장 대규모의 백제시대 사찰유구인 익산 미륵사지 발굴을 통하여 금당과 탑지를 포함한 3개의 원을 가진 독특한 사찰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중원에는 목탑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굴되었다. 같은 경내의 서탑은 목조건축의 세부를 충실히 묘사하고 잇어 목조탑에서 거대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일르 통하여 당시 백제건축의 목구조를 거꾸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백제 건축의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석조유규로 무령왕릉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전돌을 사용하여 볼트형 구조로 천장을 형성하는 구법을 보여주고 있다. 전돌에는 문양이 있는 것을 사용하여 내부에서 무늬를 형성하고 잇어 사전에 면밀한 계획 아래 축조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의 목조건축 기술은 황룡사지 발굴을 통하여 발굴된 유구를 통하여 짐작해 볼 수 잇다. 중금당지는 전면 9칸 측면 4칸 규모로 평면 중앙의 장육존상이 위치하는 곳은 일부 기둥을 생략한 감주법을 채택하고 있다. 기단은 상하의 이중 구조로 차양칸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목탑지는 중앙에 심초석이 놓이고 전면 7칸 측면 7칸의 방면평면의 목탑지가 발굴되었다. 황룔사 목탑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총 높이가 225척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비록 백제의 공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완성하였다고는 하나 삼국의 목조건축기술이 매우 발전한 단계였음을 알 수 있다.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치미는 건물의 규모가 장대하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3) 통일신라시대의 목조건축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요한 건축유구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안압지 발굴 결과 크고 작은 5개의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이들 건물지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치미, 기와 등 목조건축에 사용되었던 부재편들이 출토되어 당시 건축을 짐작케 한다. 한편 연못에서는 첨차, 서까래, 부연, 난간 등의 목조부재가 출토되어 좀더 직접적으로 통일신라의 건축 양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첨차는 끝을 둥글게 굴린 교두형으로 4단의 권살을 가져 중국의 <영조법식>에서 기술한 것과 유사하다. 첨차 중의 일부는 45도 상면에 사방향으로 홈이 파 있어 귀공포의 일부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목조건축에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귀공포가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소로는 방형의 것으로 밑굽은 안으로 내반된 곡면을 가지고 있다. 다만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 볼 수 있는 굽밭침은 찾을 수 없으며 바닥에는 촉구멍을 가지고 있다. 소로의 형태역시 <영조법식>과 유사한데 불국사 다보탑 등에서도 유사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난간은 동자주와 살대의 일부가 출토되었다. 난간대의 형태는 남원 실상사 석등과 삼층석 탑, 감은사지 출토 석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난간 상세는 일본의 법륭사 금당의 것과도 흡사 하여 당시 삼국에서 공통되게 사용하였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함께 출토된 부연과 평고대의 존재는 당시 중요한 건물에는 위계를 높이기 위하여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 집을 지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임해전  건물의 화려함은 출토된 유물 중 부연이나  창방  마구리를 장식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투각 금동제품이  있다는 것이다. 유사한 금동제품을 일본의  고대 건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목조건축을 짐작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로는  최근 발굴을  한 왕경유적이다. 고대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일정한 크기를 지닌 격자형 가로를 구성하였다. 그 단위를 방이라 불렀는데 발굴결과 1방의 크기는 (140x160m=22,400평방m )이다. 방내에는 130호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35금입택, 사절유택 등 화려한 주택들이 존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건축의 전반적인 모습은 <삼국사기> 옥사조에 기록된 계급별 건축제한 사항을 보아서도 어느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즉 집의 크기가 24척, 21척, 18척, 15척 등으로 계급에 따라 구분하였으며 모든 지붕에는 당와(唐瓦)를 사용치 못하도록 하였다. 역설적으로 당와는 궁궐 등 최고 실력자들만 사용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5두품 이하는 수두(獸頭)를, 박공에는 현어(懸魚)와 비첨(飛?)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4두품이하에서는 조정(藻井)을 금하였으며 금이나 은 혹은 오채(五彩)의 단청을 금지하였다. 목조건축의 형식과 관련한 직접적인 언급으로는 6두품 이하에서는 공아(?牙)나 화두아(花斗牙)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5두품 이상에는 공포를 사용한 구조방식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 옥사조의 제한내용

   계급

                            건      물

      재

    실의

  길이와 폭 

   기   와

  목조장식

  지붕장식

   단   청

   진  골

 

    24척

   당  와

   현  어

   비  첨

   금  은

   유  석

   오  채

   육 두 품

 

    21척

   당  와

   현  어

   비  첨

   중  복

   공  아

   금  은

   유  석 

   오  채

   백  랍

   오 두 품

  산 유 목 

 

    18척

   당  와

   수  두

   현  어

   비  첨

   중  복

   화두아

   금  은

   유  석 

   오  채

   동  랍

   사 두 품

    백  성 

  산 유 목 

 

   15척

  당  와

  수  두

   현  어

   비  첨

   중  복

   조 정

  금  은

  유  석

  동  탑


통일신라시대 목조건축의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관련 유구의 하나는 석굴암 석굴이다. 석굴암은 인도에서 전래되어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탑원굴인 돈황, 운강, 용문 등의 영향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암의 조형으로는 군위삼존석굴과 서산마애불 등을 들 수 있다. 군위와 서산의 석굴은 자연암을 가공하여 축조한 것이나 석굴암은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이다.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원형의 주실과 그 전면에 방형의 전실을 마련하였다. 석재를 가공하여 원형돔으로 축조한다는 것은 이미 통일신라시대의 건축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는 반증으로 그 우수성으로 인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전실과 주실의 사이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모습과 흡사한 팔각기둥이 서 있다.


4) 발해의 목조건축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건국한 나라로 당연히 고구려의 건축을 계승한 측면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발굴을 통하여 37개의 건물지를 노출시켰다. 그 가운데서

제1궁전지는 동서 길이 55.6미터 남북 너비 24미터의 대규모 건물지로 좌우에 사방 6미터

의 좌우익사가 붙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안학의 정전과 유사하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건축의 계승임을 반증해 주는 자료이다. 이러한 경향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고구려 안학궁의 배치수법과 유사한데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발굴결과 치미편도 확인되어 고대의 권위건물에 지붕울 장식하는 수법은 발해애석도 따르고 있음을 집작해 볼 수 있다.

상경용천부에 현존하는 석등은 발해건축의 세부를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배흘림이 있는 간석으로 보아 당시 건축에서 배흘림 수법이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는 두공이 모각되어 있다.

 

                                            

 


5) 고려시대의 목조건축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실상은 봉정사 극락전 등 현존하는 고려시대 유구룰 통하여도 알 수있다. 다만 현존하는 유구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말기에 속하는 것으로 문헌, 그림 등의 간접적인 중거를 통하여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시대 궁궐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붕들이 연이어 있고 둥근기둥에 모난 두공으로 되어있고 날아갈 듯한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만월대 발굴결과 수많은 건물지가 출토되었는데 세로장이 짧은 좌우건물이 중앙건물에 인접해 있어 마치 조선시대 객사의 평면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 수도인 개경을 묘사하면서 왕성에는 70구의 불사가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고려시대 

의 건축을 삼국시대를 계승한 것으로, 고려사에는 옛적 신라에는 9층탑을 세워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고 하는데 고려 태조는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합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목탑을 건조하는 전통을 이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탑의 존재는 만복사, 흥왕사, 남원 실상사 등의 발굴결과 방형 혹은 팔각형 평면의 목탑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되어 목탑이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목탑의 형태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유구로는 경천사지 10층석탑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2출목의 교두형첨차를 사용하였는데 이 중에는 권살의 흔적이 남아 있어 중국 송대의 <영조법식>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주간포가 배치되어 있어 이 당시 다포계 형식이 이미 정착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에는 귀공포가 조립되어 있어 안압지 등에서 발견된 귀공포의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층의 하부에는 난간 하부를 두공이 지지하고 있어 누각과 같은 중층건물을 구성함에 있어 평좌를 이용한 ‘적층식’의 가구법을 채용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고려불화에는 당시의 건축 세부가 묘사되어 있어 이를 통하여도 당시 건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일본 대은사 <관경변상도>에는 중층 건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상층 난간 하부에 공포가 묘사되어 있어 평좌층을 만들어 상층을 적층한 적층식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일본 서복사 <관경변상도>에도 건물 내부가 통층으로 만들어진 중층건물이 묘사되어 있으며 하층 건물의 하부에 공포가 묘사되어 있어 마치 현존하는 일본 동조궁 하부의 모습과 유사하다. 고려시대 현존 유구는 주심포계와 다포계로 대별할 수 있다. 주심포계는 다시 봉정사 극락전과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은 신라계주심포, 수덕사 대웅전과 같이 백제의 목조건축양식을 이어 받은 백제계와 이들을 절충적 모습을 보이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건물의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신라계주심포는 기둥 위에 두공이 십자형으로 짜이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반면에 백제계에서는 두공이 십자형이 아니고 건물 내외로 뻗은 살미형 첨차를 강조하고 있다. 목조 건축에 있어 삼국통일 이전의 백제와 신라의 특징이 보이는 것은 고려시대 석탑에서도 옛고도의 지역적인 특징이 나타나는 점과 함께 매우 흥미로룬 사실이다. 절충식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이 주두에 굽밭침을 두거나 조사당과 같이 헛첨차를 두는 등 절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포계의 유구로는 심원사 보광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주심포와 가장 큰 차이는 기둥 사이에 주간포를 걸기 위하여 평방을 놓고 가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하앙계의 존재인데 현재까지의 연구결과 고려시대에도 하앙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 유일한 예이나 대구박물관 소장 청동소탑 등에서 그 존재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6) 조선시대의 목조건축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은 고려시대의 수법을 이어받아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다포계 형식이 중요한 건물에 일반적으로 채택되어 주류를 형성하였다. 반면에 고려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던 주심포계 형식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덜 중요한  건물에 채택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익공계라는 형식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익공계는 동양삼국에서도 우리를 제외하고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으로 조선조 고유의 건축형식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3개의 건축형식 외에도 다포계와 주심포계 등이 절충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는 등 동양계목조건축에 있어 우리고유의 특성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1) 다포계 건축

다포계는 조선시대에도 시기를 따라 그 양식이 다소 달라지는데 대개 임진왜란을 시점으로 하여 전기와 구분되며 임진왜란 이후 영,정조 시기를 기점으로 중기와 후기를 구분한다. 조선전기의 다포계건축은 봉정사 대웅전과 같은 건물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전기에는 행공첨차의 상단과 보의 하단이 같은 평면에서 결구되는 수법을 취하였다. 개성 남대문과 같은 건물은 행공첨차 위에 1단의 부재를 놓고 보 하단이 결구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살미첨차 들이 보와 일체화되어 가고 있다.

보뺄목의 형상은 삼분두로 주간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출목수는 내외가 같은 출목을 하다가 건물규모에 따라 내부출목수가 외부출목수 보다 하나씩 많아지는 경향으로 바뀌어 간다. 공포부재의 구성에 있어 가장 복잡한 부분인 귀공포의 첨차와 살미가 교차하는 곳을 모두 쇠서로 장식하지 않은 모습의 간화수법이 유지되고 있어 기술적으로 아직 완성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포계 전기 건물에 있어 외부제공은 봉정사 대웅전과 같이 그 단부가 아래로 힘차게 뻗어 내려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의 제공은 아직 일체화가 덜 진행된 모습을 하고 있다.

다포계중기 건물에서는 내부출목수가 초기에 비하여 1개 정도 많아지는 경향을 띄게 된다.

살미는 후기와 같이 일체화가 진행되기 전의 과도기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즉 창덕궁 돈화문 공포를 살펴보면 외부는 초기의 아래로 강직하게 뻗은 모습에서 부드럽게 원호를 그리면서 올라가는 쇠서 형태이고 내부 3,4제공은 초각으로 장식하고 있으나 아직 1,2제공은 교두형으로 마감하여 후기의 일체화되어 장식하는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보머리는 초기의 삼분두와 같이 간략한 모습에서 권비형으로 장식화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기둥 상부에서는 창경궁 명정전 등과 같이 초각한 형태의 안초공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다포계 후기건물에서는 내부출목수가 외부 보다 2~3개 많아지는 경향을 하고 있다. 이는 내부의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조형적인 의도가 그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뺄목 등은 초기 삼분두와 같은 간략한 모습에서 용주사 대웅전과 같이 봉황두, 전등사 대웅전과 같이 용두로 변화한다.

출목 수의 증가와 함께 살미의 내외부가 일체화되기 시작한다. 일체화는 건봉사 대웅전과

같이 외부는 쇠서 상부에 연화를 초각한 모습으로 내부는 연화를 초각한 형태를 예를 들 수

있다. 살미는 장식화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쇠서의 단부가 길게 원호를 그리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취하게 된다. 귀공포의 구성에 있어서 논산 쌍계사 대울전과 같이 첨차와 살미가 교차하는 곳을 모두 연화초각의 화려한 쇠서로 장식하고 있어 기술적으로 완성되고 장식화가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식화는 공포 내외부 단부에도 개암사 대웅전과 같이 용두장식이 사용되거나, 불국사 대웅전 귀공포 한대가 용두로 장식되는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한편 용주사 대웅전에서는 기둥 상부의 안초공이 용두모습으로 화려하게 나타난다. 궁궐건물인 경복궁 근정전에서는 당초문을 초각한 안초공이 기둥 상부를 장식하고 있어  사찰건물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2) 주심포계

고려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주심포 건물은 다포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위축된 사용보습을 보이고 있다. 중요 건물보다는 주로 부속건물 등에서 많은 사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고려말의 주심포 형식에 비하여 차이점은 주두와 소로의 굽은 내반된 것에서 간략하게 사절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이는 시공상의 편의에 의한 과정으로 추정된다. 기둥 머리에는 무위사 극락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송광사 국사전과 같이 헛첨차를 가지고 있다. 참차 단부는 사절하고 하단은 주심포의 통상모양인 쌍S자형으로 치목하고 있다. 공포 외단은 쇠서형으로 예리하게 전면으로 뻗는 모습이다. 반면에 내부는 당초문으로 초각한 양봉으로 나

타난다.


(3) 익공계

익공식은 원칙적으로 기둥, 주두와 익공 3개의 부재가 한번에 어울려 출목 없이 보를 직접받도록 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인사 장경판전의 공포가 전형적인 익공의 모습이다. 이러한형식의 가구법은 우리 전통건축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 익공은 기둥 상부에만 결구되며 기둥 사이에는 화반 부재를 얹어 마치 다포계 초기의 주간토보다 간략한 형태의 주간포를 배치한 것과 유사한 개념을 띄게 된다. 익고은 주건물에 사용되기 보다는 궁궐 침전, 관아건축, 누정 등, 향교 등 부차적인 곳에 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익공계와 주심포계의 구체적인 분류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즉 기둥 위에 공포를 얹어 놓는 방식으로 본다면 익공계도 주심포계에 속한다. 그러나 외부에 돌출한 살미가 어떤 현태로 포개어지고 돌출되는지와 보머리가 살미 위에 직접 얹혀지는지 아니면 일체화되어 형성되는지의 구분을 들 수 있다.

익공은 건물 규모 등에 따라 초익공, 이익공으로 구분된다. 초익공의 예로는 청평사 회전문을 들 수 있으며 이익공으로는 경복궁 경회루를 들 수 있다.

 

한편 익공계가 기둥과 상부하중의 전달에서 간략화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출목이 도입되면서 부터는 그 한계가 모호해진다. 이런 경우를 전형적인 익공계와 구분하여 주삼포라고 칭한다. 출목익공계는 주삼포의 다른 명칭으로 대개 17세기 이후의 건물에서 그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종묘 정전 건물은 1출목 이익공 사례 중의 하나이다.


(4) 절충계

조선시대 목조건축 형식의 주류가 주심포에서 다포로 옮아 온 것은 사실이나 후기에 들어 서면서 여러 유형간의 절충형태가 나타난다. 법주사 원통보전의 경우에는 외2출목의 전형적인 다포계공포를 주상포로 사용하였으나 주간포는 생략하고 화반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원통보전은 다포계와 익공계가 혼합되어 있는 절충식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밀양영남루는 주상포로 1출목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나 주간포는 생략하고 화반으로 대치하여 익공계의 양상을 띄고 있다. 공포는 내부는 출목없이 양봉 형태로 일체화 장식되고 있어 익공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외부 살미는 쇠서형으로 연봉으로 장식하여 다포계의 형태이다. 그러나 기둥 상부 머리에서 구성되어 상부 살미와 일체화되는 모습은 익공계와 유사하며 다포계와 익공계의 모습이 복잡하게 절충되는 후기의 시대적 모습을 띄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하앙을 사용하고 있는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 현존하고 있다.


(5) 하앙계

하앙은 길게 내민 처머 서까래를 지지하는 출목도리와 장여를 지지하기 위하여 보하부나

중도리 장여 등을 받쳐 지랫대의 원리로 균형을 이루는 긴 사장재로 공포 구성부재의 하나이다. 하앙은 중국이나 일본의 전통건축에서는 그 오랜기간 중요하게 사용되어 왔으나 우리의 경우에는 실제 유구는 화암사 극락전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여 금산사 미륵전, 금강문 등에서 하앙을 사용하였던 것이 밝혀져그 지평을 넓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에도 하앙이 사용되었던 것은 기정사실이나 어느시기에 하앙이 보편성을 잃어 버린 이유 등에 대하여 앞으로 연구해야할 숫재이다.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형식은 기본적으로 중국, 일본과 함께 동양계목조건축형식을 공유하고 있으나 하앙이 거의 사라지고 쇠서형의 다포계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쇠서의 초각수법은 중국,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우리 고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미술사분야에서도 도자가 중에서도 조선백자가 자리하고 진경산수와 같은 독특한 화풍이 자리잡는 전체적인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 목조건축의 구조형식


목조건축의 구조형식은 크게 대량식(擡樑式), 천두식(穿斗式), 정간식(丼幹式)의 3가지로나

눌 수 있다. 대량식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들보를 얹어 놓는 방식으로 건물의 뼈대를 형성하는 구법으로 측면으로는 도리, 창방 등으로 연결한다. 대량식은 동양계목조건축의 중요한 건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가구법이다.

이 가구법에서는 주로 기둥 위에 공포를 얹어 가구를 형성하여 지붕하중을 지지하고 있는데보는 지붕하중으로 인하여 휨하중이 발생한다. 그 결과 보의 단면이 부족할 경우에는 보의 중앙이 처지는 문제가 발생하며 단부에서는 전단력 부족현상이 발생 할 수 있다.

따라서 건물의 주칸과 보의 단면이 가구의 강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반면에 서양식의 트러스 구조는 이론상 부재에 압축과 인장력만 작용하는 구조이므로 휨응력이 작용하지 않아 긴 스펜을 걸치는데는 대량식보다는 유리한 구조이다.

천두식은 대량식에 비하여 주칸거리를 상대적으로 조밀하게 설정하고서 기둥머리를 수평부재인 ‘천’으로 꿰어 골조를 형성하는 구법을 이른다. 자연히 기둥의 직경은 적어지고 보의 중요성은 줄어드는 방식이다. 따라서 대규모의 경간을 지닌 건물에는 적합지 않고 주택 등 비교적 소규모의 건물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재료도 대나무를 사용한 예가 많다.

                               

천두식 현존 건물의 사례는 남아 있지 않으나 부여 능산리 등의 건물지에서 천두식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발견되어 과거에는 우리전통건축에서도 천두식 구조를 채택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중국의 경우에는 남부지방에서 대나무 등을 사용한 천두식 구조가 발달하여 아직도 많은 유구를 찾아볼 수 있다.

정간식은 목재를 겹겹이 쌓아 건물의 벽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오늘날 산간지역에 남아있는귀틀집을 예로 들 수 있다. 정간식은 산간과 같은 특정한 지역에 주로 건립되었으며 구법상 대규모 경간의 건물에 쉽게 축조하기는 어려워 주거용으로 제한되어 사용되었다. 고구려 건축에서 부경같은 창고는 정간식 구법을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전통 목조건축에서는 일부 특수한 사용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요한 건물에는 대량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기둥과 보를 사용하여 건물을 축조하다보면 자연재인 목재의 특성상 무한정  보, 기둥과 같은 부재의 단면을 확대 할 수 없기 때문에 건물규모의 확대에 따라 보, 도리, 기둥 등을 적절히 가감하여 건물가구를 형성하게 된다.

대량식으로 가구체를 형성할 경우 평면에 따라 기둥의 기본적인 주망이 구성된다. 가장 기본적인 주망구성방식은 평면 기둥사이를 생략하지 않고 빠짐없이 격자형으로 연결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만 주망을 구성하게 되면 평면 내부의 효용성이 줄어 든다.

따라서 내부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위하여는 일부 기둥을 생략하거나 기둥의 위치를 옮기는 등 감주(減柱)와 이주(移柱)의 기법을 채용하게 된다. 이러한 기법의 채용은 기둥의 위치를 변화시키는데에 따른 가구의 기술적 해결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평면은 앞에서 설명한 내부공간의 활용 외에도 전체공간의 확장이 필요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는 전후의 고주와 함께 전후퇴가 형성된다. 고주를 경계로 하여 내외진이 공간적으로 구분된다.

전통건축의 평면을 흔히 정면 몇칸 측면 몇칸으로 부른다. 특히 측면 칸수는 대들보, 고주 등의 유무를 결정하는 건물 규모를 설정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주칸길이는 대개 8척에서 10척 정도로 측면 칸수가 가구구성과는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주칸이 일정한 길이가 아니고 기둥과 기둥사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건물에 따라서는 주칸 차이가 있으므로 주칸 길이가 반드시 건물규모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 목조건물에서는 평면 형태, 건물규모의 수평방향으로의 확장, 단층과 중층건물 등 수직방향으로의 확장, 내부공간 활용에 따른 기둥의 변화 등이 종합적으로 감안되어 기둥, 대들보, 도리 등을 적절히 사용하여 가구를 구성하게 된다.


2-1 단층건물의 가구

층수가 단층인 건물들의 가구방식은 종단면상의 스펜에 따라 도리의 사용 개수에 따른 양가(樑架)의 형성과 지붕 형태에 따른 지붕가구에 따라 좌우된다.


1) 양가형식

목조건물은 건물 규모에 따라 다양한 가구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이때 전후에 평주를 대들보만으로 걸치는 경우가 있으나 어느 정도 경간이 커지게 되면 대들보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이때에는 내부에 고주를 설치하여 대들보가 지지하는 스펜을 줄여주는 방식으로 해결하게 된다.  스펜이 커지면 자연히 서까래를 받는 도리 숫자가 늘어 나게 된다.

건물 규모의 증가에 따라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가구 분류의 방식은 도리 숫자에 따른 가구분류 방식이다. 즉 주심도리와 종도리 사이에 몇 개의 중도리를 사용하였는가에 따라 3량가, 5량가, 7량가, 9량가 등으로 구분한다. 한편 전후면에 퇴칸이 부가되어 있는 경우 반오량가, 반칠�가, 반구량가 등으로 앞의 것과 구분하여 분류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도리의 숫자를 헤아리는 원칙이다. 즉 주심도리, 외목도리와 내목도리는 구조적으로 하나의 지점역할을 하는 것으로 하나로 산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 간의 간격이 다를 경우 도리의 숫자가 반드시 건물규모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도면)

 

                  

2) 지붕가구형식

전통 목조건축에서 지붕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가구를 채택하게 된다. 지붕의 형태는 평면과도 상당한 연계성이 있다. 즉 방형 평면의 경우에는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맞배지붕 등을 필요에 따라 선택하게 된다. 팔작지붕은 격식을 갖춘 건물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맞배지붕은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부속건물에서 많이 채택하였다. 그러나 우진각 지붕은 궁궐의 문루 등 제한적으로만 사용하였다. 한편 육각형, 팔각형 등의 평면은 정자와 같은 특수한 목적의 건물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평면이 장방형평면일 경우에는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맞배지붕 등 여러 가지 지붕형식의 채택이 가능하다. 팔작지붕은 측면에서 보아 합각부위를 만드는 입면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합각부위의 존재는 전체 지붕을 화려하고 위엄있게 보이게 한다. 평면의 네모서리에 추녀를 걸고 추녀 단부를 중도리 등에 걸쳐 지붕 네모서리의 내림마루를 만든다. 측면 합각부

위의 하중은 평주와 대들보 사이에 충량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 등을 놓아 지지하는 형식을 취한다. 팔작지붕은 측면에서도 지지하는 부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구조상의 문제가 생겨도  맞배와는 달리 가구가 회전하는 양상으로 변형한다.

우진각지붕의 가구는 기본적으로 팔각지붕과 유사하다. 다만 팔작지붕에서 추녀가 중도리 등에 걸쳐지는 것과는 달리 종도리 위에서 모이게 된다. 따라서 내림마루가 팔작지붕보다는 길게 형성되는 입면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맞배지붕은 팔작이나 우진각과는 달리 측면에 충량과 같은 부재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측면에서의 구속력이 약하다. 상대적으로 횡방향으로 장혀, 도리 등의 부재를 사용하여 강성을 보강하고 있다. 맞배지붕의 입면상 가구의 변형은 지붕 경사면이 건물 전후로 흐르려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상하의 보와 도리 등은 합장재, 우미량, 초방 등으로 보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장방형이거나 원형 혹은 육각형, 팔각형 평면을 한 경우에는 장방형 평면과는 다른 가구법을 채택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평면은 정자건물이 가장 일반적이다. 창덕궁 애련정과 같은 정자에서는 기둥 위에 도리를 두어 네모서리에 추녀를 올린다. 이 때 짧은 심주를 세우고 추녀 뒷뿌리를 끼워 놓는다. 이 경우 추녀 뒷뿌리는 지붕 하중으로 인하여 상부로 들리는데 이것을 무거운 절병통을 얹어 놓아 균형을 유지한다. 따라서 통상 정자 건물에서는 다른 건물과 같이 지붕하중을 보를 통하여 전달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용하지 않는다. 상호간의 균형에 의존하여 지지하는 수법은 쌍봉사 대웅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2-2 중층건물의 가구

건물규모가 수평적으로 확대되는 경우에는 앞의 예에 따르나 수직적으로 확대되는 경우에는 다른 방식으로 가구를 형성하게 된다. 건물규모가 수직으로 확대되는 경우는 중층전각과 목조탑파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1) 중층전각

중층전각은 궁궐정전, 사찰주불전, 성곽루문 등이 대부분이다. 중층전각은 보통 2층이 대부분이나  금산사미륵전, 함경도의 수항루와 같은 3층건물도 현존하고 있다. 중층전각은 상하층 연결방식과 체감방식에 따라 가구방식이 여러 가지 유형으로 달라진다.

중층건물에 있어 상하층의 연결방식은 상하 별개의 층으로 구성하여 중간에 인공의 구조물이 평좌(平座)를 형성하여 상하층을 얹어 놓는 가구법이 있다. 즉 적층식(積層式) 중층건물에서는 상하층이 하나의 기둥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서로 분리되는 상하층 기둥이 중첩되어 놓이는 구조이다. 이러한 가구방식은 중국 한대의 독락사 관음각, 일본의 법륭사 금당과 같은 건물이 현존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천사지10층석탑, 고려시대 불화 등에서 그 존재가능성은 충분히 입증되어 과거에는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찍이 중층건물 가구방식의 주류를 이루었던 적층식 가구는 풍하중과 같은 수평력에 취약하여 상하층을 연결하는 통층가구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현존하는 중층건물은 화엄사 각황전과 무량사 극락전과 같은 2가지 유형으로 크게 구분된다. 창경궁 인정전은 하층퇴칸의 일부 길이만을 체감하는 ‘반칸물림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에 중국과 일본의 중층전각은 하층퇴칸길이 전부를 체감하는 온칸물림방식을 많이 채택하고 있어 이채롭다. 반칸물림방식으로 체감하는 경우에는 전체 외관이 장중하고 위엄이 있다. 상하층이 반칸으로 체감되는 경우에는 하층 내진고주와 외진 평주 사이에 퇴보를 걸고 그 위에 상층변주를 놓게 된다. 따라서 하층내진고주가 연장되어 상층변주 역할을 하는 경우에 비하여 기술적인 난이도가 높다.

한편 평면의 모서리에는 상층 평주를 지지하는 보의 결구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가구법이 생겨난다. 첫째 금산사 미륵전 하층에서는 내진고주와 외진평주를 연결하는 사방향의 귓보를 이용하고 있다. 귓보는 방향이 사방향이라는 점 외에는 퇴보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평양 대동문과 같은 경우에는 귓보와 직각되는 방향으로 귀잡이보를 걸고 그 위에 상층변주를 놓았다. 셋째는 경복궁 근정전과 같이 하층평면 모서리에 귀고주를 설치하여 그대로 상층까지 연장하여 상층변주 역할을 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가구방법은 궁궐건물인 창덕궁 인정전과 서울 성곽의 문루건물인 남대문, 동대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돋특한 가구법이다.모서리에서 상하층이 연결되어 앞의 가구법들에 비하여 가구 전체의 강성이 커진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러한 건물 예를 찾기 어렵다. 넷째는 앞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방식이 조합되어 나타나는 방식이다.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에는 귀잡이보와 귓보를 조합하여 놓고 그 위에 상층변주를 얹어 결구하는 수법을 채택하고 있다.

무량사 극락전은 앞의 예와는 달리 하층퇴칸 길이전체를 체감하고 있다. 따라서 하층 내진 고주가 그대로 연장하여 상층변주가 되고 있다. 따라서 반칸물림 중층건물에 비하여 입면의 장중함은 줄어드나 대신 강건한 맛이 있다. 반칸물림방식에 비하여 기술적으로 간결하나 구조체의 강성은 반칸물림방식에 비하여 증대된다.

송대의 건축기술서인 <영조법식>에서는 이러한 가구방식을 전당건물에서 부계병전으로 하나의 건축유형으로 기술하고 있을 만큼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현존하는 중국과 일본의 궁궐 정전 및 사찰 정전 등 대부분의 중층건물은 온칸물림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2) 목조탑파

목조탑파는 목조건물의 규모가 수직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중층건물과 가구법이 유사하다. 탑파는 원래 인도의 벽돌을 조적식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 산치 대탑을 보면 사발을 거꾸로 얹어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와 누각형 목조건축으로 번안된 것이 현재의 목조탑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전래와 함께 목조탑파가 유행하였다가 삼국시대에 이르러 석조탑파로 변화되었으나 쌍봉사 대웅전과 법주사 팔상전이 남아있다. 쌍봉사 대웅전은 1982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현재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쌍봉사 대웅전이 다른 목탑과 달리 특이한 수법은 1층에 심주(心柱)가 없어 천장 속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 결과 하층 외목도리와 추녀로 사각형의 뼈대를 만들어 그 정점에 심주를 세웠다. 심주에 의지하여 각층의 가구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방식을 방식을 택하고 있다. 따라서 외관은 체감율이 적어 고준(高峻)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상부 하중은 외목도리를 지점으로 지붕의 하중과 균형을 이루는 가구법이다.

쌍봉사 대웅전은 전형적인 목조탑과 가구법과는 심주의 특이함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독립된 개별 층을 쌓아 올리는 적층식 가구법을 채택하고 있다. 일본의 법륭사 오중탑, 법기사 삼중탑과 유사하다.

  

앞에서 예를 든 3기의 목조탑파는 상하층 사이에 간략한 형태의 평좌를 이용하여 상층가구를 적층하였으나 중국 응현 소재 불궁사탑은 기둥과 공포를 이용하여 제대로 구성한 평좌층을 만들어 상층가구를 얹어 놓은 점이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가구법의 차이는 불궁사 탑과 전례의 3기의 탑과 평면의 규모 차이에 기인한 가구법의 차이로 해석된다.

우리의 경우에도 황룡사목탑과 같은 대규모 평면의 목탑에서는 불궁사탑과 같은 평좌층을 형성하고 각층의 별개 가구를 적층하는 방식을 채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건물규모 상 법륭사오중탑과 같은 간략한 평좌로는 상부를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좌층이 없는 상하기둥이 연결되는 가구법은 목조탑파의 경우에는 상하층의 길이가 너무 길어 합리적이지 못한 해결방식으로 추정된다.

  

법주사 팔상전은 쌍봉사대웅전과 달리 중앙에 심주와 사천주(四天柱)로 코어를 형성하고 그 주변에 내진고주를 두어 상층가구를 연결하고 있다. 상층변주는 하층변주와 사천주를 연결하는 퇴보상에 놓고 있다. 자연히 쌍봉사 대웅전과 같은 적층식에 비하여 체감율이 큰 외관을 하고 있다. 쌍봉사 대웅전은 목조탑파 고유의 가구법이라기 보다는  전각형 중층건물의 가구법에 가깝다. 이러한 가구는 원래 사방 3칸 탑파를 중창하면서 사방 5칸의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생겨난 독특한 가구방식으로 추정된다. 사방 3칸의 존재는 기단부를 해체하면서 적심석을 통하여 밝혀진 바 있다.

 

3. 목조건축의 부재와 결구

 

전통목조건축은 부재와 부재를 짜맞추어 전체 구조를 형성하는 가구식(架構式) 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의 특성상 구조체의 강성은 기본적으로 부재의 강도는 물론 부재와 부재가 결구되는 방법에 따라 좌우되는 측면이 크다.

목조건축에서 부재와 부재가 연결되는 방법은 크게 이음과 맞춤으로 구분된다. 이음은 2개 이상의 부재를 길이방향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종류는 맞이음, 빗이음, 턱이음, 장부이음, 홈이음, 촉이음, 주먹장이음, 빗걸이이음 등이 있다. 맞춤은 둘 이상의 부재를 직각 혹은 경사지게 연결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통맞춤, 반턱맞춤, 연귀맞춤, 사괘맞춤, 장부맞춤, 주먹장맞춤, 촉맞춤, 은장맞춤, 산지맞춤 등이 있다.

맞춤과 이음은  앞에서 예를 든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부재와 부재가 연결되는 위치, 부재의 가공성, 작용되는 힘 등을 고려하여 적절한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목조건축 부위별 결구방식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둥

기둥은 목조건물의 입면의 뼈대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재의 하나이다. 단면은 원형과 방형의 것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원형 건물은 대부분 중요 건물로 격식이 있는 곳에 사용하고 각재는 부속건물이나 주택같이 격식이 떨어지는 곳에 사용한다. 드물게 팔각형과 같은 다각형단면 기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동일 건물에서 원형과 방형단면 기둥을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경복궁 경화루 하층의 경우 외곽에는 원형 석주를 내부에는 방형석주를 사용하는 등 혼용하고 있다.

 

기둥의 가공수법은 민흘림, 배흘림과 흘림이 없는 3가지 방식이 있다. 배흘림 방식은 하부의 1/3 정도 높이를 가장 통통하게 다듬어 시각적으로 안정되게 가공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시기적으로 올라가는 고대의 방식이나 시대가 떨어지면서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다.

민흘림 수법은 기둥 상부에서 하부로 갈수록 단면이 커지게 가공하는 수법이다. 흘림없이 가공하는 기둥 단면의 경우 시각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감이 있다.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가공하여 사용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던지 기본적으로 기둥과 초석은 별다른 연결방법이 없이 그대로 놓여지고 있다. 현대 서양의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하부 기초를 철재 등을 사용하여 연결하는 방법에 비하여 전통목조건축에서는 마찰력 만으로만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감은사지 회랑유구 등에서 기둥과 초석이 촉으로 연결되는 듯한 유구가 보여 마찰력의 증대를 목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마찰력을 보강하는 방법의 하나로 기둥 하부를 그랭이질하여 기둥과 초석의 마찰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마찰력만으로 상부하중을 지지하는 구조일 경우 수평력에는 상대적으로 약할 수가 있으나 기와와 흙으로 덮여있는 무거운 지붕하중이 이를 지탱하고 있다. 전통목조건축 평면은 대부분 방형으로 전체적으로 박스형으로 되어 있는 골조가 지붕하중이 어는 한쪽으로 편중되는 것을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범어사 일주문과 같은 경우는 일렬로 된 기둥 위에 과도하게 보이는 지붕하중이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잃지 않고 있어 기둥과 초석의 마찰력으로만 지지하는 전통목조건축 구조의 독특함을 잘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기둥은 건축형식에 따라 크게 2가지 방식으로 결구된다. 첫째는 도리, 장여 또는 보, 보아지가 기둥 상부에서 맞추어 지는 경우이다. 기둥 상부에서는 건물 횡방향과 전후방향의 2방향에서 부재가 직교하게 된다. 이를 고려하여 기둥 상부를 네갈래가 되도록 파는 결구방식이 사괘맞춤 혹은 화통가지라고 한다. 사괘맞춤으로 치목할 때에는 바깥보다는 안쪽의 너비를 넓게 하여 연결 부위가 빠지지 않도록 한다.

또 하나는 기둥 상부에 안초공, 보아지가 끼이고 위에 평방 또는 주두가 얹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주두는 기둥 위에 혹은 평방 위에 포간 거리에 따라 놓이는데 하부에는 촉을 사용하여 결구한다. 안초공은 반턱으로 따서 안장처럼 기둥 상부에 물린다. 창방은 기둥 상부에서 사괘맞춤으로 결구한다.

 

기둥 하부가 부식되어 일부를 잘라내고 신부재를 연결하여 사용하는 경우이거나 목조탑파 등에서 길이가 긴 부재를 구하지 못하여 여러 개의 짧은 부재를 연결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연결 방식은 촉, 주먹장, 맞장부, 엇거리산지 등 다양한 방식이 채택된다. 이들 방식의 선택은 축압력과 같이 단순한 하중을 받는 경우에는  장부촉 정도의 맞춤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횡력이나 편심하중이 발생하는 곳에서는 맞장부, 엇거리산지이음 등이 유리하다.

 

금산사 미륵전 고주에서는 긴촉이음을 사용하였는데 2가지 모습으로 결구하고 있음이 해체결과 발견되었다. 즉 긴촉장부 상하 기둥 부재에서 만들어 끼우는 방식이 하나이고  또 다른 방법은 촉을 별도의 부재로 만들어 상하 기둥 장부 홈에 끼워 넣는 것이다.

 

기둥 부재를 수직으로 연결하여 사용하는 경우 앞에서 설명한 이음만으로는 결구가 불안정한 경우에는 별도의 보강방식을 필요로 한다. 즉 금산사 미륵전 고주의 경우에는 척이음을 사용하면서 척이 길어 횡력 등에 약한 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상하 2개의 목재비녀장을 박았다. 이 외에도 보강띠쇠를 대어 결구부위의 강성을 증대코자 하였다. 미륵전의 경우에는 고주가 상하로 중심선이 연결되지 않을 정도로 굽어 이를 보강하는 방법으로 기둥 옆면에 각재를 대어 상하 기둥이 밀려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에서는 금산사 미륵전과는 달리 십자형쌍촉이음 방식을 사용하였다. 법주사 방식은 미륵전에 비하여 비틀림에 유리한 결구방식이다. 또한 촉을 반쪽으로 만들어 상하 기둥을 연결하는 반쪽이음도 사용하고 있다.


2) 공포

공포는 기둥 상부에서 지붕의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지붕 하중이 지붕으로 전달되는 지점을 넓여주어 안정되게 전달되게 하며 동시에 처마를 길게 내밀 수 있는 역할을 한다. 공포는 동양계목조건축의 가장 독특한 구성부재의 하나로 시대적인 양식을 대표한다. 

 

공포는 주간포가 놓이는 유무에 따라 다포계와 주심포계로 구분한다. 다포계에서는 기둥 사이에 주간포를 놓지만 주심포계와 익공계에서는 화반과 같은 받침으로 주간포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 유일한 하앙계의 현존유구이나 주간포를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포계와 같은 방식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공포 구성부재 중 하앙이라는  사방향의 부재를 사용하는 점이 차이가 있다. 익공계는 주심포계가 간략하게 축소된 모습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 즉 공포계통 간의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공포 부재간의 차이는 크게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공포 구성의 기본부재인 주두, 소로, 살미, 첨차 등을 중심으로 결구를 살펴 보기로 한다.

 

주두는 됫박처럼 네모진 부재로 기둥머리 혹은 평방 위에 놓이는 공포 구성부재의 하나이다. 주두는 통상 정벙형 평면으로 상부는 직절하나 하부는 사절 혹은 오목굽형상을 하고 있다. 주두는 사용하는 위치에 따라 기둥 위의 것을 주두, 익공계 보의 바닥 밑에서 소로 대신 놓이는 것을 재주두로 구분하여 부른다. 다포계 평방 위에 놓이는 주두를 기둥 위의 것과 구분하여 대접받침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두 하부의 기둥 혹은 평방과 맞대는 면은 촉으로 고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두는 살미나 첨차 등의 건물 종횡단면의 부재가 직교하는 곳으로 4방향의 결구를 위해 살미 폭만큼의 갈을 따내게 된다. 갈은 구체적인 ‘ㅅ’자 혹은 ‘일’자형 알통을 두어 좌우로 미끄러짐을 보강한다.

 

소로는 운두와 굽을 갖춘 됫박모양의 네모진 부재로 주두의 축소판으로 연상된다. 소로 굽역시 주두와 마찬가지로 사절되거나 오목한 것으로 2가지로 구분되는데 오목한 것이 고대의 것이다. 소로의 바닥에는 굽받침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는데 있는 것이 오래된 것이다. 귀공포에서는 운두 없이 받침만 사용되는 것을 접시소로라고 부른다. 접시소로는 경우에 따라 정방형 외에 육각형 혹은 팔각형 평면의 것이 사용된다.

소로는 그 사용되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갈을 가공하게 된다. 첨차의 양끝에 놓이는 소로는 장여가 건물횡단면으로만 지나가므로 이에 맞추어 갈을 가공하므로 양갈소로라고 불리운다. 살미와 첨차가 만나는 곳은 부재가 직교되는 곳으로 갈이 사방향으로 나게되어 사갈소로라고 한다. 부재가 세방향으로 만나는 곳에 위치하는 소로는 세갈소로로 불리운다.

한편 벽체에서 건물 외부로만 붙여 쓰는 반쪽소로를 딱지소로라 부른다. 소로 바닥은 주두와 마찬가지로 촉으로 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간혹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첨차는 건물 횡방향으로 구성되는 공포 구성부재의 하나이다. 사용장소에 따라 주심첨차, 출목첨차, 행공첨차 등으로 구분한다. 행공첨차는 출목첨차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사용된 것을 구분하여 이르는 말이다. 또한 크게에 따라 소첨, 대첨 등으로 구분하여 이른다.

다포계 건물에서 첨차는 주칸길이의 설정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부재로 법주사 팔상전과 같이 포간 길이의 차이로 나타나는 시각상의 부조화를 첨차의 한쪽길이를 조절하는 수법을 사용하는 등 의장과도 관련이 많은 부재이다. 

 

살미는 도리방향의 첨차와 직교하여 짜이는 공포부재이다. 살미는 주심첨차와 결구하여 내외출목첨차를 지지하며 출목수가 늘어나면 이중, 삼중으로 포개어 지면서 내외 출목도리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일본의 동대사 남대문은 첨차가 생략되고 살미만으로 6출목에 해당하는 처마를 출첨한 보기 드문 가구법이다.

 

다포계 건물의 살미 외단은 환성사 대웅전과 같이 직절하는 교두형(翹頭形), 쌍계사대웅전과 같이 소의 혀같이 길게 내민 모습에서 유래하여 쇠서형(牛舌形)등으로 구분된다. 쇠서형에서는 통상 밑의 여러 쇠서는 앙서(仰舌)로 하고 제일 위의 것은 수서(垂舌)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앙서에서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연봉, 연화등으로 장식하였다.

 

익공계는 다포계와 달리 수서형을 취하거나 아예 몰익공과 같이 초가지를 없애는 방법으로 마감하고 있다. 주심포계는 다포계와 달리 밑에는 쌍S자형으로 하고 혀는 다포계와는 다른 모습의 굴곡을 주고 있다.

 

살미와 첨차는 서로 직교하는 부재로 서로 반턱맞춤으로 하는데 대개 첨차를 받을장으로 하고 쇠서는 엎을장으로 한다. 귀한대는 3개의 부재가 결구하는 곳으로 삼분턱맞춤으로 한다. 즉 제일 위에는 한대, 쇠서, 맨 아래에는 첨차가 놓여진다. 좌우대는 쇠서의 삼분턱이 바뀌어서 결구된다. 한대와 교차하는 부위는 전통목조건축에서 가장 복잡한 부위의 하나이다.

 

3) 보

대량식 구조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전통목조건축에서는 하중을 지지하는 중요한 구조부재가 보이다. 보는 건물 경간에 따라 대들보, 종보, 중종보 등의 보를 중첩하여 사용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건물 전후면 평주 사이의 종단면상에 걸쳐지는 주된 보이다. 종보는 보통 5량 이상의 규모의 집에서, 중종보는 보통 7량집 이상의 건물에서 많이 사용된다.

 

건물 스펜이 큰 경우에는 대들보 외에도 종보, 종중보 등의 여러 보를 중첩하여 여러개 사용하는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상하의 보를 도리 위치 등을 고려하여 적절한 공간을 두고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경복궁 근정전에서는 대들보 위에 바로 또 하나의 보인 가량을 얹어 놓아 마치 합성보와 같은 개념으로 장스펜에 걸리는 하중을 지지하는 독특한 가구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창덕궁 인정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보는 그 사용 위치에 따라 앞에서 설명한 것과 다른 위치에서 사용하게 된다. 툇보는 대들보보다 한단 낮게 걸리는 보로 보통 건물 전후면 퇴칸에 사용된다. 툇보는 평주와 내진 고주 사이에 걸쳐지게 된다.

충량(衝樑)은 측면 평주와 대들보 사이에 걸쳐 지며 합각부위의 하중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팔작지붕 건물에서는 충량이 있으나 봉정사 대웅전과 같은 고식의 건물에서는 충량을 생략하고 있다. 충량은 직선재인 경우도 있으나 평주와 대들보의 높이가 차이가 있어 곡선재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층량 위에는 동자주 등을 놓아 합각부위의 하중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우미량(牛尾樑)은 수덕사 대웅전의 예와 같이 도리와 도리 혹은 보와 도리 사이를 연결하는 부재로 서로의 높이 차이르 고려하여 곡선재의 모습을 한 것을 칭한다. 그 모습이 마치 소의 꼬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우미량은 상부 하중을 지지하는 보의 기능은 거의 없고 상하의 도리와 보등의 간격을 서로 유지케 하는 연결재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

 

귓보는 내진고주와 우주 사이에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지르는 보를 지칭한다. 중층 건물인 경우에는 상층 변주가 귓보 상에 놓이게 된다. 귓보와 직교되게 평면 모서리에 걸리는 보는 귓보와 구분하여 귀잡이보로 불리운다.

 

보가 기둥 위에 바로 놓이게 되는 경우에는 보뺄목에 기둥 화통가지에 끼이는 숭어턱을 만들고 결구한다.

다포계에서 보와의 연결 부위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즉 보의 하단에 장여가 물리는 경우에는 장여푹 만큼을 따넣어 결구하고 있다. 그러나 구례화엄사 각황전 공포와 같이 보가 장여와 측면에서 결구되지 않고 그 위에 얹히는 경우에는 보의 측면에 장여를 따넣지 않고 보상단을 도리 단면에 맞추어 둥글게 깍아 도리가 구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서울 동대문과 같은 경우에는 내진고주의 상부에 좌우 평주에서 걸쳐지는 보가 서로 만나는 맞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때에는 결구를 보강하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산지를 끼워 보강한다. 충량이 대들보 등의 보와 만나는 부위는 반턱으로 결구되거나 그냥 대들보 위에 얹히는 2가지 방식을 취하고 있다.

 

* 위 글의 원문은 http://cafe.daum.net/arumdaunhanok

출처 : 나무과자
글쓴이 : 순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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