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백패킹은 수도권의 백패킹성지로 거론되는 원적산의 천덕봉 직전의 박지에서 선배님 두분과 친구 2명 후배1명이 진행하였다.
원적산은 동으로는 여주시 흥천면, 서로는 광주시 곤지암읍, 남으로 이천시 백사면과 경계를 이루며 동서로 길게 이어지고, 무적산(無寂山)이라고도 한다. 동쪽 원적봉(563.5m) 기슭에 638년(선덕여왕 7년)에 창건했다는 영원사(靈源寺)라는 사찰이 있으며, 주봉인 천덕봉(635m)은 이천에서 제일높은고 기슭에는 율수폭이라는 폭포가 있다. 고려말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신둔면 장동리 쪽에는 군사훈련장이 있어 입산이 제한되므로 산행은 백사면 경사리 쪽에서 시작한다.
북쪽 계곡길을 따라가면 신라 27대 선덕여왕(638)때 해법선사가 창건한 영원사(靈源寺)가 있다. 조선 순조 때 김조순이 재건한 이 사찰에는 높이 25m에 둘레가 5m나 되는 은행나무가 있어 사찰의 운치를 더하고, 최근에 사찰의 규모가 커지며 예전의 풍광을 느끼기는 어렵다.
원적산 백패킹 박지 (붉은선 위치)
원적산 등산 코스 안내도
출발하기전 한컷 (좌부터 이찬종후배 오늘의 리더, 박용환 신양호 선배님 두분은 졸업후 처음뵙는 듯, 요즈음 백패킹을 시작한 신홍준 홍성근 친구)
짐은 무거워도 마음은 경쾌하다(오늘리더 찬종후배 는 배낭무게가 35kg이상 되는것 같다)
11 : 22 능선에 도착해서 땀을 드린다.
12 : 10 원적봉에 도착
천덕봉 으로 가는길 길이 이쁘다
계단 심하다 단차가 심한곳은 30cm 가 넘는 곳도 있다(계단아래의 세굴을 방지하지않으면 더 심해질듯하다)
천덕봉에서 즐거운 모습으로
정개산쪽 능선을 진행해보고
억세와 태양의 조우
우리의 보금자리인 박지를 구축
연어 셀러드 ( 주방장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오늘밤이 개대된다)
17 : 47 천덕봉 일몰
맛난 음식에 곡차를 겯들여 옛이야기와 살아온예기를 나누다보니 밤이 깊다.
18일 6:45 일출을 감상하고 태양의 기운을 느껴본다
09:30 박지를 아니온듯 정리하고 하산
11:10 하산을 완료하고 부처님전에 삼배를 올리고 영원사를 돌아본다
성근찬구 추천으로 청학동 한정식(부발읍)에서 오찬을 즐긴다
(양호형님이 쏘셨다, 학교를 졸업한지 30몇년이 지나도 후배는 즐겁다)
원적산은 해발 635m로 이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천덕봉과 원적봉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천을 감싸 안고 있다. 강원도 오대산이 비로봉을 정점으로 불교의 문수사상을 상징한다면, 원적산은 척덕봉을 정점으로 불교의 무소유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원적산을 무적산(無寂山)이라 기록하고 있다. 불교에서 무적(無寂)은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원적산을 갈마산(曷麻山)이라고도 부른다. 도립리 육괴정에 모셔진 조선 중기 유학자 엄용순의 모표에 나오는 이름이다. 원적산 영원사의 약사여래좌상을 수마호석(水馬胡石)을 갈아서 만든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한다. 원적산 · 무적산 · 갈마산 모두가 불교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원적산에는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의 한이 깃들어 있다. 몽골의 침략 이후 고려의 자주권은 원나라에 넘어갔고, 왕의 이름도 원나라에 충성을 의미하는 '충○왕'으로 변경되었다. 공민왕은 자주권을 찾기 위해 친원세력의 대표격인 기씨(奇氏)일파를 숙청하고, 변발과 몽골 복장의 착용을 금지하였으며, 원나라의 내정간섭기관인 정동행성을 폐지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약화된 원나라를 멸하고 한족을 중심으로 한 왕조를 세우기 위한 혼란기였다. 1360년 홍건적의 1차 침입은 잘 막앗으나, 이듬해 대규모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개경이 위태하자 공민왕은 남하하여 11월 24일 이천에 도착 후 며칠간 머문 것으로 추측된다. 공민왕이 축성하였다는 원적산 산성, 천덕봉을 공민봉이라 부르는 것이 그 증거이다. 또한 백사면 현방리에 휴궁다리(시궁다리)는 공민왕이 원적산으로 피난 갈 때 이 다리 위에서 잠시 위어 갔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전해진다. 구전에 의하면 원적산과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안산마을 사이 계곡에 여기수(女妓水, 여계수-女溪水)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왕을 따르던 궁녀들이 개경 함락 소식에 통곡하며 이 연못에 몸을 던진 데서 연유한 지명으로 전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이 이천과 음죽에 머무를 때 홍건적의 침입에 겁을 먹은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도망갔을 때, 음죽 사람 배원경이 10여 호의 고을 사람과 남아 공민왕을 극진히 대접하여 후에 음죽 감무에 임명된 일화를 전하고 있다. <이천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자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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